“세계은행의 진로는 한국이 과거에 겪었던 길로 향해 갈 것이다. (지난 시절 한국이 경험했던 것처럼) 길은 안정적이고도 모두가 낙관할 수 있는 곳이 될 것이다.” <뉴욕타임스 4월 16일자> “나는 비포장 도로와 높은 문맹률을 가진, 전쟁이 막 끝난 한국이란 나라에서 태어났다. 나는 그토록 가난한 나라가 글로벌 경제 속에 편입되면서 가장 역동적이고 부유한 곳으로 변해 가는 것을 지켜봤다.” <파이낸셜타임스 3월 28일자> 김용 총재는 세계은행 총재에 입후보할 때는 물론 총재로 당선된 뒤에도 한국과 한국계에 대한 말을 빼놓지 않았다. 미국교육을 받은 미국 국적자로서가 아닌, 한국계로서 한국의 경험과 발전사를 전세계에 전도하겠다는 포부를 ‘틈만 나면’ 밝혔다. 김용 총재의 성공담은 ‘결코’ 머리 좋은 한국계 인물의 개인적인 영광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인이 쌓아 온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대변인이자 증거’로서 세계은행 총재에 당선된 것이다.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용 총재는 1964년 미국 아이오와주 머스카틴(Muscatine)으로 건너간다. 아버지 김낙희(1987년 별세)씨는 한국전쟁 중이던 17세 때 평안북도 남포에서 단신 월남, 서울대 치대를 나왔다. 머스카틴에 정착한 김낙희씨는 아이오와주립대학 치과교수로 일했다. 어머니 전옥숙씨 역시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실향민이다. 외할아버지는 시조시인 전병택씨고 외할머니 이경자씨 또한 시인이었다. 문학가 집안의 딸답게 전옥숙씨는 미국에 건너가 아이오와대학에서 퇴계 연구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전쟁과 가난 때문에 주변 사람들 모두가 한반도 어딘가로 흩어지거나 아예 외국으로 떠나서 살아야 했던 것이 김용 총재의 가계사(家系史)이자 한국의 현대사이다. 김용 총재 가족의 첫 보금자리인 머스카틴은 인구 2만의 작은 내륙 도시로 주변의 나무를 이용한 가구산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김용 총재의 중·고교 재학시절은 한국인에게 ‘특히 약한 부분’을 강화하는 시기로 활용된 듯 하다. 사회성이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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