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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토론으로 세계를 품다


매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에는 전 세계를 대표하는 리더들이 모여든다. 올해는 지난 1월24일 정계, 재계, 언론계 등 각 분야 지도자들 2400명이 참석해 ‘변화하는 힘의 평형’을 주제로 포럼을 열었다. 그들 가운데는 스물세 살의 한국인 여대생, 최유선이 있었다. 그는 호주, 이스라엘, 아프리카, 이집트, 스위스에서 온 젊은이와 한 팀을 이뤄 ‘세계 교육기금’ 마련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함께 패널로 참가한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당시 재무장관)와 라니아 요르단 왕비가 그를 포함한 젊은이들의 지혜에 아낌 없는 격려와 지지를 보냈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다 

지난 1월 다포스 포럼에 최연소 발제자로 나섰을 당시 최씨는 이화여대 국제학부 졸업을 앞둔 학생 신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외교통상부에서 어엿한 영문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그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비슷한 연배로서 위축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세계의 리더들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자를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직접 만난 그는 당당함과 겸손함을 겸비한, 친근한 또래의 젊은이였다. ‘최연소’ 발제자라는 말에 그는 “엄밀히 말해 같은 팀의 스위스 친구가 저보다 한 달 빨리 태어났으니 그가 최연소”라며 웃었다. 최유선은 세계경제포럼 측이 영국문화원에 의뢰해 전 세계 대학생을 대상으로 선발한 6명의 토론자 중 한 명이었다. 각 분야 지도자들이 젊은 인재들의 의견을 들어 보자는 한 것이 그들을 포럼에 참가시킨 취지였다. 49개국에서 1차로 선발된 60명의 젊은이들이 영국 그리니치에 모여 나흘간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그 중 딱 한 팀(6명)만이 다보스 포럼에 패널로 참가할 수 있었는데 바로 그가 속한 팀이 뽑혔다. 그는 다보스 포럼에서 팀원들과 함께 “국제 교육펀드를 만들어 세계인이 공평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세계 석학들 앞에서 발제자로 나선 기분을 묻자 “팀이 잘 해줘서 묻어갔을 뿐”이라고 겸손해했다. “사실 믿기지 않았어요. 토론 장소에 들어가 패널 명단에 제 이름이 적힌 걸 보고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죠. 빌 게이츠가 기자회견 하는 모습이나 눈 앞에 지나가는 각국 대통령들을 보면서 그저 신기해서 ‘우와’ 하고 감탄사만 연발했어요.”

연습 또 연습, 영어토론의 달인으로 거듭나다.

그가 처음 영어토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 교내 영어토론 동아리에 들어가면서부터이다. 국내 최초의 영어토론 동아리였기에 선배들과 함께 직접 몸으로 부딪쳐 가며 배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동아리에 가입한 지 두 달 만에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 대회에 나갔어요. 일본에서는 10년 넘게 토론 문화가 발전해 왔고,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토론에 아주 강해요. 저희는 매 라운드 깨지면서 토론에 대해 이런 저런 것들을 배웠죠.” 토론대회는 그저 둥그렇게 앉아 자기 생각을 목소리 높여 이야기하는 자리가 아니다. 대개 2~3명이 한 팀이 되어 5~7분 간 정해진 주제에 대해 조리 있게 논리를 펴 나가야 한다. 토론 주제는 대회 시작과 동시에 알려지는데, 팀별로 주어진 주제에 대해 정부 측인지, 비정부 측인지가 정해지면 15~30분 간 준비 시간이 주어진다. “세계권에서 입상하는 팀들을 보면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는 문제들에 대해 완벽하게 공부를 해 와요. 주어지는 주제들은 이라크 문제, 북핵 문제 등 다양하죠. 개인적으로는 낙태에 반대를 하더라도, 토론에서 찬성하는 쪽 역할이 주어지는 경우도 있죠. 따라서 누가 더 많은 지식을 조리 있게 활용하느냐에 승패가 달려 있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10년 간 생활한 그이지만, 일상 영어와 토론 영어는 차이가 있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유창한 영어발음만으론 심판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토론에 적합한 영어를 구사하기 위해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팀들의 동영상, 명연설 등을 듣고 대본을 읽으며 연습했다. 그러다가 좋은 문장이다 싶으면 노트에 일일이 적어 외웠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할 내용을 간결하고 조리 있게 정리해야 하는데 그 부분이 부족했어요. 직접 심판을 해 보면서 많이 배웠죠.” 알고 있는 지식들을 매끈한 문장으로 표현하게 되자 영어토론 무대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호주에서 가장 영어토론을 잘 했던 분을 심판으로 초대한 적이 있는데, 그분은 하루에 뉴스 듣는 데만 2~3시간을 들였대요. 영어토론은 본인의 신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지식을 논리의 틀에 담아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죠. 평소에 끊임없이 준비하고 연습해야 하는 일이에요.”

다보스 포럼을 계기로 기회를 만나다.

그러던 중 영국문화원에서 각 학교에 세계경제포럼에 나갈 사람들을 모집한다는 안내문을 돌렸다. 면접을 통과한 그는 영국 그리니치에서 세계 49개국의 젊은이 60명과 만났다. 다보스 행 티켓을 놓고 각 6명씩 팀으로 묶여진 그들에게 주어진 예선 토론 과제는 ‘세계권력을 지닌 사람들에게 과제와 해결방안을 제시하라’는 다소 애매한 것이었다. “영국문화원이 교육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10팀 중 7팀이 교육과 관련된 주제를 정했어요. 저희 팀은 이전부터 조금씩 얘기가 되고 있던 ‘국제 교육펀드’를 주제로 정했죠.” 국제개발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유태계와 아랍계 청소년을 위해 일하는 아랍계 이스라엘인,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아프리카인 등 그가 속한 팀의 면면은 다양하고 뛰어났다. 10팀 중 5팀, 또 2팀…. 토너먼트 형태로 순위가 좁혀졌고, 치열한 경합 속에 결국 그의 팀이 다보스 행 티켓을 땄다. “영어토론에는 한가닥 하는 친구들이 모인 까닭에 다른 팀은 목소리가 컸는데, 저희 팀은 조용히 의견을 잘 모으는 편이었어요. 다른 팀들도 정말 다들 똑똑하고 뛰어났는데 팀워크가 좋아서 저희가 뽑힌 것 같아요.” 그의 팀이 다보스에서 발표한 내용은 ‘세계 교육기금’을 만들자는 것. 교실 당 학생 수가 스위스는 12명, 모잠비크는 70명으로 빈부격차에 따라 교육의 격차가 심한데 교육이 평등해지지 않으면 세계화도 요원하기 때문에 에이즈나 말라리아 기금처럼 ‘세계 교육기금’을 만들자는 것이 뼈대였다. 같은 방에서 패널로 참여했던 요르단의 라니아 왕비는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고든 브라운 영국총리는 지난 4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은행기부자회의’에 그들을 초대해 같은 주제로 발표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때 조지 소로스와 식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어요. 그분이 리비아와 라이베리아 중 한 곳의 교육을 위해 50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빌 게이츠의 투자로 인해 말라리아가 사라진 것처럼 교육 쪽에도 빌 게이츠 같은 분이 필요해요. 사기업의 지원을 얻어 펀드를 조성할 방안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에요.” 세계은행기부자회의에서 그들은 새로운 기회를 추천받았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주최하는 포럼에 나가보라는 추천이었는데, 이곳에 가서 발표를 하면 사기업에서 펀드를 지원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추진하는 중이다. “저희 팀이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 움직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처음엔 다보스 포럼 발제가 끝나면 온라인으로만 활동하려고 했는데 말이에요. 앞으로 좀 더 함께 활동할 것 같아요. 클린턴 포럼 건도 더 알아보는 중이에요.”

세상에서 원하는 변화를 스스로 이끌어라 

그는 영어토론에서 발표를 잘 해서 우승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상에서 원하는 변화를 나 스스로 이끌자, 이것이 제 인생 모토예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발전시키는 일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어요.” 그는 앞으로 국제개발 쪽으로 더 공부해 꿈을 이뤄 나갈 생각이다. 영어토론의 달인인 그에게 재미있는 질문을 해 봤다. 영어토론 자리에서 꼭 맞대결 해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웃으며 “그리니치에서 만난 친구들을 20년 후쯤 다시 만나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친구들은 인권이나 봉사 등에 열정을 갖고 있는 똑똑한 젊은이들이잖아요. 젊을 때는 그런 문제에 열정을 갖기가 쉬워도 점점 나이가 들면서 현실적으로 변하게 돼요.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열정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을지 궁금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스스로도 현재의 꿈과 열정을 끝까지 지켜 나가는 것이 숙제라고 말하지만, 그 모든 것을 혼자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욕심껏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아니면 그가 지금 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 “처음 한국에 와서 대학에 입학했을 땐 소위 ‘외국물 먹은 애들’이라는 편견 때문에 힘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최선을 다하면 감사하게도 길이 조금씩 조금씩 열리는 것 같아요. 점점 커 갈수록 나는 역시 한국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영어에 익숙한 한국인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걸어갈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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